네덜란드 출신 조선 무관 박연의 흥미로운 이야기

조선 최초 외국출신 무관 '박연'


서양에서 귀화한 조선의 무관 박연, 그의 이야기는 한국사에 흥미로운 챕터로 남아 있습니다. 본명은 얀 얀서 더벨테브레이(Jan Janse de Weltevree)였으며, 귀화 후 조선 이름은 박연으로 바뀌었습니다.


박연은 화란 출생으로, 조선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인 "박연"은 '벨테브레이'와 '얀'의 발음과 유사하여 선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사에는 윌리엄 애덤스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레이프 출신으로 추정되며, 박연은 선원으로 일하던 중 1626년에 홀란디아호의 승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항해 중에 태풍에 휩쓸려 제주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태풍으로 인해 동행한 아우베르케르크 호와 헤어져서 혼자 제주도에 남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조선(고려)에 대한 여러 오해와 편견이 존재했는데,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식인 풍습이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어, 박연이 제주에 상륙했을 때 선원들은 조선인들이 인육을 먹는다고 생각하여 공포에 떨었고, 하늘에 통곡하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박연은 조선 관례에 따라 송환되어야 했지만, 당시 중국과 명과 후금이 갈등 중이었기 때문에 명나라로 송환하는 대신 일본으로 보내려 했으나 일본에서는 거절당하면서 조선으로 의뢰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거절에 포기하고, 결국 박연은 조선에서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결혼하고 귀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인 아내와의 사이에는 아들과 딸을 두었으나, 현재로서는 박씨 문파가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연의 후손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박연은 본관을 하사받은 드문한 외국 귀화인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경제에서는 원산 박씨가 그의 후예일 가능성을 제기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과 족보를 찾는 것은 어려운 과제입니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벨테브레이의 네덜란드어는 서투르게, 조선어는 유창하게 구사했고, 조선인들은 그를 조선인으로 대우했다고 전해집니다.


박연은 병자호란에 참전하고 동료 2명과 함께 싸웠으나 그만 살아남았고, 이후에는 다양한 역할을 맡아 조선의 통치에 기여했습니다. 헨드릭 하멜의 표류기에 따르면 벨테브레이는 하멜과 조선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했으며, 조선인들은 그를 동포로 대우했다고 합니다.


박연의 이야기는 성리학적 이념과 외국인들이 조선으로 귀화하는 데 어떤 관심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는 조선의 통치에 기여하고 귀화 후에는 안정된 생활을 살았으며, 그의 이야기는 한국사의 흥미로운 측면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박연의 이야기는 다양한 작품과 방송에서 다루어져 왔으며, 그의 생애와 미스터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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